Journal2023. 9. 11. 22:43

 

 

Helmut Lang  

 지난 2004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의 가치와 영향력이 대외적으로 정점에 이르렀을 때, 브랜드의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던 프라다 그룹의 설립자로서 자신이 가진 모든 지위와 지분을 매각하고, 브랜드의 모든 권리와 미래를 위임하며, 그 길로 패션계를 완전히 떠나 현직 예술가의 삶을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에 전직 패션디자이너 헬무트 랑은 오늘날 20세기 끄트머리를 경이 하는 많은 패션디자이너에게 가장 듬쑥한 메아리를 얻고 있는 인물이다. 그만큼 패션 디자이너로써 그가 남긴 과거는 시간에 박제되어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은퇴 후에도 현대에 무수한 표준들을 떠받치는 그림자로 남아, 우리의 삶 속의 알게 모르게 존재해 왔다. 그리고 지금껏 우리는 관습적으로 이러한 그림자들을 '미니멀리즘<최소주의>'이라 부르며 상징해 왔다. 하지만 오늘날 패션디자이너로서 헬무트 랑의 이름을 '미니멀리즘'이란 한정된 양식으로 가두기엔 그가 만들어 낸 세계는 훨씬 더 광대해 보인다. 물론 1990년대 패션계를 상징하는 가장 높다라한 위치에 그의 이름이 있고, 미니멀리즘이 당시 급변한 소비문화와 시대 분위기를 헬무트 랑의 이름과 이어주는 핵심 연료임은 염연하나, 패션디자이너로서 그가 선보인 미학과 방식은 제품 안과 밖으로 보다 간결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리멀리즘의 갈래에서는 선뜻 떠올리기 어려운 난해한 요소들이 많았다.

 먼저 남성복 역사에 거대 단편 중 하나인 밀리터리<군용>장식과 아웃도어 이전에 일상복의 가장 두드러진 등장으로 보이는 스포츠의류의 각각 펑크 문화를 상징하는 가장 본질적 요소인 본디지 장식을 세부 구성으로 얹어, 펑크가

본연의 영역 외에 일상복의 기능으로써 패션의 범주에 자연스럽게 머물 수 있도록 신선하고, 세속적인 섞임을 이루어 냈다.

 


 또한 그는 고급 기성복 브랜드가 지닌 데님의 잠재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헬무트 랭의 데님에는 오리지널리티를 과시하는 현란한 가공도 없었고, 스티치로 판별하는 계단이나 브랜드의 서명이 들어간 고고한 외부 장식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유년 시절 리바이스에게 빚진 일상복의 감수성과 캘리포니아의 오래된 향기를 한결 정돈된 느낌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데님들은 작업복의 어원을 부드럽게 따르면서 새로운 오피스웨어라고 해도 나무랄 데 없을 만큼 몸을 타고 흐르는 가느다란 실루엣은 유순하고, 아름다웠다. 그 안에서 입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깔밋한 맵시와 꼼꼼한 세공은 과거를 기워낸 완전한 유니폼이라는 말의 가장 가깝게 남았다. 물론 오래된 화법 사이로 이채로운 귓속말들도 많이 남겼다. 대표적으로 1998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그는 당시 패션계가 요구한 기발한 연출이나 환상 없이도 새로움을 선언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누구에게나 나이 든 살갗의 기호인 주름이 생기듯이 데님은 익어가는 매력을 지닌 옷이다. 헬무트 랭은 데님의 이러한 물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디자이너였으며, 이것을 ‘자연스러움’이란 이데올로기로 궁리해 만들 줄 아는 디자이너였다.

카키색 진흙 가공을 자연스럽게 입힌 데님 셋업이나 검정과 하얀색을 띠는 고무와 유사한 재질의 소재를 오묘하게 가공된 푸른 데님에 흩뿌리듯 붙여 만든 페인터 데님은 패션 디자이너로서 그가 만들어 낸 세기말의 걸작 가운데 하나이면서, 오늘날 시간에 더께를 입힌 낡은 청바지를 선망하는 가장 아름다운 표본으로 현대에 남았다.

 컬렉션의 성취 바깥에서도 그의 페인터 청바지는 특별한 방식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래픽 디자이너 Peter Saville가 총괄하고, 유르겐텔러<Juergen Teller>가 사진 작업을 맡은 뉴오더<new Order>의 2001년 앨범 'Get Ready'의 커버 사진은 독일 출신의 영화배우 Nicolette Krebitz가 헬무트 랑의 페인터 청바지를 입고, 일본 기업인 SONY사의 캠코더를 들여다보며, 한쪽 눈을 가린 채 공허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흑백 사진과 함께 세상에 나왔다. 이 사진에서 헬무트 랭의 의상을 입은 Nicolette Krebitz의 모습은 그들의 음악을 세상에 소개하는 시각적 안내서로 부족함이 없었다. 비록 그 안에는 음악가를 예술가로서 조명하는 사치스러운 기예나 화려함은 없었었지만, 당대의 그래픽디자이너가 단호하게 그어 놓은 빨간 선이 그의 컬렉션의 어떤 지점과 연동되는 것처럼 헬무트 랭의 옷 역시 음악과 패션을 시각적으로 연동시키는 상징적 도구로써 독자적이고, 긴요한 몫을 충분히 해냈다.
 

 
 
 

 데님을 포함한 그의 옷과 장신구들은 오래된 고전의 걸터앉아 있으면서도 고급 기성복이 추구해야 할 현대적인 목표와 앞으로의 시대에 대한 일상복의 비전을 연이어 제시하고 만들어 냈다. 1995년 가을/겨울 컬렉션을 시작으로 오랜 시간 선보인 짧아진 몸통 길이와 잠금장치가 없는 소매가 가늘고 기다란 구조로 만들어진 데님재킷은 긴 팔을 한 뼘 정도 접어 입거나 있는 그대로 펼쳐 입을 수 있어서 새로운 범용성을 가진 데님재킷처럼 보였다. 2003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선보인 한쪽 소매를 가죽 소재로 전환한 비대칭 구조의 데님재킷은 원단의 끝처리를 일부러 거칠게 가공하여, 유사한 성질을 지닌 서로 다른 직물이 주는 혼합된 느낌을 갈라진 콘크리트 같은 차분한 조형미로 만들어 보여주기도 했다. 이처럼 기본에 충실하면서 새로움을 꾀한 그의 데님은

‘부드러운 작업복’이라는 명제로 현대에 남았다.
 
  필자는 오래전 블로그에 그가 만든 데님을 '리바이스의 제국주의를 아름답게 허문 옷'이라고 말한 기억이 있다. 지금도 이 생각은 유효하다. 오히려 그런 조용한 시도들이 훗날 데님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브랜드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 모델이 되었고, 앞선 과거에 현대적 고전으로 남았다고 생각한다.

 옷과 장신구를 만드는 데 있어서 그의 안목과 미학엔 남다른 시야와 지혜가 있었다. 그는 아무도 관심 두지 않던 일상 속 쓰임들을 독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자신만의 참신한 아이디어로 삼았다. 화재 현장에서 소방복을 착용하는 소방관들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산업용 반사판 줄무늬를 딱딱한 데님과 부드러운 코트, 매끈한 테일러드 재킷에 본래의 기능과는 전혀 관계없는 색다른 시인성으로 반영해 자신만의 옷을 만들 줄 알았고, 현장 업무를 수행하는 경찰들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방탄조끼는 거위 털 충전재를 사용해 계절을 반영한 보온 기능을 지닌 옷으로 부드러운 슬랙스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미래의 작업복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용의자들의 손목을 결박하는 도구로 만들어진 수갑을 꼼꼼한 세공을 통해 팔찌로 만든 사례는 아무도 ‘패션’의 범주에서 쓰임을 발견하지 못한 소재에 새로운 가능성을 느낀 헬무트 랭만의 차갑고 부드러운 사고가 빛을 발한 작품이었다.


 물론 구조적으로 잘 만들어진 군용 파카와 작업복들은 그가 만들어 낸 미니멀한 작업의 정교한 앞면이었지만, 내부에 달린 단순한 어깨끈 하나만으로 ‘천사’ 와 ‘우주’ 같은 아름다운 환상을 떠올리게 하는 힘은 헬무트 랭만이 지닌 새뜻한 창조의 뒷면이기도 했다. 그는 클럽 문화와 테크노 음악을 새로운 직물로 표현할 줄 아는 디자이너였으며, 오랜 세월 패션계가 세우고, 무너뜨린 성별에 대한 경계를 누구보다 유순한 방식으로 허문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이렇듯 잘 만들어진 공산품으로써 브랜드를 빛나게 지었던 그의 재능은 브랜드를 소개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탁월한 감각을 보였다. 1997년 고향이면서 주거지였던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떠나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브랜드의 거점도 프랑스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긴 그는 곧 뉴욕에서 선보일 자신의 컬렉션을 알리는 목적으로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실제로 운행 중인 노란 택시 표지판에 ‘HEMUT LANG’ 서명이 들어간 브랜드의 로고를 특유의 폰트로 새겨 넣고, 실시간으로 뉴욕 도시 전역을 주행하는 광고 방식을 추진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공간을 점유하여 겉보기엔 휘황해 보이지만 능동성은 부족해 보였던 기존 광고방식들과는 다른 자유로운 공간감과 생기가 있었고,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 풍경에 흔한 캠페인 사진 한 장 없이 그가 만든 공산품들처럼 단출한 내용과 사고의 변화만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준 광고 사례로 남았다.

 뿐만 아니라 패션쇼 백스테이지 사진에 대한 기능을 분주한 내부적 기록으로만 남겨 두지 않고, 브랜드를 상징하는 기록으로 외부에 더 너르게 내세운 것도 헬무트랑 이기에 사고할 수 있는 탁월한 쓰임이었고, 지혜였다.
 

  사실 현대의 시각으로 반추해 보면 그가 만들어 낸 시대와 패션은 머리카락이 쭈뼛 설만큼 놀라운 미학이라고 보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고전으로 전해지는 방식도 가시적인 실루엣과 정서로 회자 되는 느낌 역시 드물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이 여전히 유요한 의미로 사람들에게 듬쑥한 메아리를 얻고 있는 이유는 그가 지은 패션이 고전이 잇대어진 가장 간명하고, 아름다운 패션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오직 현실에서 고안해 낸 도회풍이 깃든 패션이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는 현대를 만들면서 미래를 보여주었고, 그곳이 도시라면 어디든 어떤 지명을 넣어도 존재할 수 있는 패션을 만들었다. 나는 이것이 ‘미니멀리즘’이란 명제보다 현대에 더 가까운 미학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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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hinjunho
Journal2022. 12. 12. 15:58

 

thank you RAF SIMONS

 

돌연 27년이란 세월에 마침표를 찍은 지금도 이토록 휘황하다니, 그가 남성복을 통해 이룬 아스라한 경지는 앞으로 후대에도 줄곧 바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저에겐 다른 브랜드의 옷과 장신구를 더듬을 때도 그가 만들어낸 공산품을 염두에 두고, 지혜를 서성이던 기억이 많았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아쉬움도 크지만, 마지막까지 브랜드를 재화로 매각하지 않고, 외부에 위임하지 않는 것으로 설립자가 통제할 수 있는 가장 헌결찬 선택을 한 부분에 대해 팬으로서 작은 경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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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hinjunho
Journal2022. 6. 23.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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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보면 옷에 대해 어섯눈을 겨우 뜬 푸르른 시절부터 스웨트셔츠<SweatShirt>를 좋아했다. 물론 운동복의 실용적 대안으로 등장했던 과거의 지혜와 자신이 소속된 대학의 명칭을 자부심처럼 드러낸 고전적 기능이 오늘날 일상복의 보편적 영역을 이룬 밑절미란 사실엔 굳건하지만, 굽어지고, 휘어져 겨우 찾아낸 내 알량한 심미안은 언제나 그렇듯 보편적 감수성보단 좀 더 견결하고, 얄궂었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전임 디자이너의 환상을 산산이 조각내며, 거리문화가 낳은 럭셔리 하우스의 새로운 총아처럼 등장한 뎀나바잘리아<DemnaGvasalia>가 지휘하는 발렌시아가<Baleciaga>는 자신에게 깊다란 인상을 남긴 1990년대 끝머리와 2000년대 첫머리 패션에 헌정하는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성공사례라 할만하다. 물론 항공모함 같은 운동화와 기념품처럼 너르게 번진 발렌시아가의 다변화된 로고가 새겨진 제품들은 몇 번의 계절을 지나오는 동안 분명 한풀 꺾인 추세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스웨트셔츠를 주류문화에 편입시키며, 한 움큼 듬쑥한 현상을 만든데 자연스레 그의 얼굴이 겹쳐짐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정서나 감각의 깊이에서 선대 디자이너들에게 빚진 인상을 줌은 엄연하나 패션에서 그것이 꼭 시장에 성취와 나란한 것은 아니기에 나 역시 그의 행보에 반감 보단 호의적인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최근 몇 번에 계절을 지나오는 동안 현실에서 멀어진 제안을 하는 꾸띄르 컬렉션 정도를 제외하면 그가 만드는 발렌시아가는 나에게 그저 심드렁한 브랜드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지난 2020년 끝머리에 일본 도쿄<Tokyo> 아오야마<Aoyama> 지역에 위치한 발렌시아가 플래그쉽<flagship> 스토어 리뉴얼 기념으로 출시한 후드 파카<hood parka>는.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갖고 싶은 제품으로 남아있다. 당시 ‘cut up’ 이라는 캡슐 컬렉션 주제에 걸맞게 각기 다른 원단을 세로로 이어 붙여 만든 옷들이 구성에 전부였는데, 특유의 치밀하게 설계된 엉성함이 인상적 이었다. 특히 뎀나바잘리아가 그간 발렌시아가에서 선보인 로고 작업의 두드러진 몇 가지 형태들을 조합해 들쑥날쑥하게 이어 붙인 저마다의 원단들과 조화시킨 부분이 깔밋하지 않고, 색달라서 마음에 들었다. 갈수록 거리문화를 염두한 많은 패션 브랜드의 결론이 일종에 자기계발서처럼 최초의 발견 당시에 기분을 그리 오래 전하지 못하는 느낌이 짙다. 여기에는 경향이나 시장의 문제도 있겠지만, 창조와 기획을 비슷한 역량으로 생각하는 사례도 많아 보인다. 무조건 소비자보다 앞선 경향을 만들며, 높은 기술과 고품질의 소재를 사용해 만든 제품을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 브랜드 고유의 새로움을 제시하는 것, 거기에 살롱 문화와 거리문화 사이에 간극이란 크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마음으로 제품을 만드는 기성복 브랜드를 많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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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between-magazine.tistory.com/ [between-magazine: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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